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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세계사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로필 유부남 불륜 나치 스파이 생애 키 나이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출연진 서이자 교수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

by 해피냥냥이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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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세계사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로필 유부남 불륜 나치 스파이 생애 키 나이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출연진 서이자 교수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신현지 재방송 110회

 



​벌거벗은 세계사
가브리엘 코코 샤넬 프로필 유부남 불륜
나치 스파이 생애 키 나이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출연진 서이자 교수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신현지
재방송 110회​






8월 1일 오후 10시10분 방송되는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0회에서는 서이자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선다. 이날 방송에서 서 교수는 20세기 패션 아이콘 샤넬이 패션 제국을 일구기까지 걸어온 길에 대해 강연한다.


서 교수는 샤넬이 성공을 갈망한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꼽는다. 샤넬은 고아원에 버려져 각종 차별과 모욕을 당하면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패션 디자이너로 한 단계씩 성장했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샤넬은 당시 여성의 몸을 억압했던 코르셋이 필요 없는 편안한 옷을 디자인하는가 하면 당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소재와 색을 사용하는 혁신을 일으키며 패션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 서 교수는 패션을 통해 새로운 시대상을 이룩한 샤넬이 자신만의 홍보 전략을 활용하며 사업가로도 명성을 떨쳤다고 설명한다.



또 샤넬이 만난 여러 연인들과의 일화, 나치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은 사연, 치명적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재도약할 수 있었던 그의 패션 철학도 소개한다. 이날의 여행 메이트로는 모델 신현지와 프랑스에서 온 실로에가 함께 한다. 아시아 모델 최초 샤넬 쇼 클로징 모델로 선 신현지는 샤넬 디자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담을 공유한다. 실로에는 샤넬이 활동한 20세기의 시대적, 사회적 모습과 여성들의 생활상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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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나이 키 프로필 국적 생애
▶​본명 :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Gabrielle Bonheur Chanel
▶​출생 :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멘에루아르 소뮈르
▶​사망 : 1971년 1월 10일 (향년 87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 프랑스
▶​신체 : 169cm
▶​직업 :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간첩
▶​수상 : 니먼 마커스 패션 어워드 (1957)




생애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수녀원의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투철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고,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7] 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샤넬을 촌x이라고 디스한 것은 덤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으로 넘어가서 현재까지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샤넬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온 그녀였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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