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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정보

꼬꼬무 시즌3 친일파 독립유공자 이광우 아들 이상국 착혈고문 친일경찰 고문귀 하판락 프로필 학력 나이 후손

by 다크그레이캣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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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친일파 독립유공자 이광우 아들 이상국 착혈고문 친일경찰 고문귀 하판락 프로필 학력 나이 후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3 68회
 
3월 2일 밤 방송에서는 피로 물든 아버지의 청춘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들의 추적기를 조명합니다. 매년 8월 15일이 되면 대형 카스텔라를 사서 초를 붙이던 상국씨네 가족. 막내아들 상국씨는 이 모든 상황이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생신은 3월이잖아요. 왜 8월 15일에 생일파티를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생일이 두 개란다.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야."
 


 
이 비밀스런 생일파티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상국씨의 나이 29세가 되던 1989년,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겪었던 일들에 대해 상세히 듣게 된 이후였습니다. 당시 10대였던 아버지가 일제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과,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원수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1942년, 당시 17세였던 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경남 경찰부 고등경찰과 외사계였습니다. 항일 전단을 뿌린 혐의로 체포된 아버지가 겪은 일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발길질과 몽둥이질은 기본, 물고문 에 압슬고문까지 잔인한 행위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끔찍한 고문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최악의 고문의 이름은 ‘착혈 고문’입니다.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주사기로 고문당하는 사람의 몸을 여기저기 찔러 피를 뽑은 후 얼굴과 몸에 사정없이 뿌리는 이 착혈 고문은 당하는 이뿐 아니라 보는 이까지 극한의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형사의 이름을 뼈 속 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 이름은 바로, 하판락이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습니다.
 


광복 4년 후, 아버지와 하판락은 아주 뜻밖의 장소에서 재회를 하게 되는데요, 그곳은 바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정이었습니다.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기동안 자행된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설치된 특별기구였는데요, 친일경찰 하판락이 피고로서 법정에 서고,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재판정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고문한 원수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의 뻔뻔한 태도에 울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고문한 사실이 없습니다.
저 사람,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판락은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났고, 아버지는 한 맺힌 청년시절을 가슴 한구석에 묻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모두 알게 된 아들 상국씨는 아버지의 일이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한 상국씨의 10년간의 긴 추적이 시작됩니다. 상황은 좋지 않았습디다. 


김천소년형무소의 기록은 6·25전란 중에 불에 타서 없어졌고, 부산형무소의 미결 기록과 판결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국씨는 아주 의외의 장소에서 뜻밖의 단서를 찾게 됩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우연히 발견한 ‘어버이날 포상대상자 명단’ 기사에 하판락의 이름 석 자와 주소가 실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을 마지막 방법으로 하판락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상국씨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도 말씀 드립니다.


 

“죽여 버려라.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
보면 죽여 버려라.”

 
 
아들 상국씨는 아버지의 울분에 찬 외침을 가슴에 품고 하판락을 찾아가비다. 과연, 친일경찰 하판락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요? 그리고, 58년 묵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인가요?


 



우리에게 ‘광규 형’으로 친근한 배우 김광규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찾아왔습니다. 평소 예능에서 쾌활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줬던 김광규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자로 기록된 자료를 술술 읽는 것은 물론 일제 강점기와 반민특위에 관한 이야기에도 깊은 이해력을 선보이며 제작진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단골손님으로 거듭난 배우 장희진이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함께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장희진은 “세 번째 나왔는데 오늘만큼 소름이 돋는 건 처음이다”라며 분노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달달한 목소리의 주인공 가수 적재가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찾아왔습니다. 적재는 시대의 굴곡과 역사적 분기점을 온 몸으로 겪어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를 들으며 ‘나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104주년 3.1절을 맞아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 '58년 만의 복수! 착혈귀를 찾아라'는 3월 2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송됩니다.
 
 

하판락 프로필 나이 학력
 河判洛

▶ 창씨개명 : 가와모토 한라쿠 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 河本正夫
▶ 별명 : 고문귀
▶ 자 : 문숙 文淑

▶ 본관 : 진주 하씨
▶ 출생 : 1912년 2월 15일 경 남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 사망 : 2003년 9월 11일 (향년 91세) 인천시
▶ 국적 : 일본 제국, 대한민국
▶ 학력 : 진주제일보통학교 (졸업)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 3회)
경력 : 사천경찰서 경찰
부산 외사계 고등경찰
前 부산신용금고 사장
▶ 정당 : 무소속
 
 

생애
고문귀

 
 
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아버지 하한운(河漢云, 1887. 5. 24 ~ 1962. 8. 16)[6]과 어머니 동래 정씨(1887. 2. 2 ~ 1966. 2. 26)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판락의 형은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면서기였고, 그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유학하고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가 6.25 전쟁 당시에 월북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1930년 1월 17일에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후 동년 2월 9일에 풀려난 적도 있었고, 1932년 진주고등보통학교(3회)를 졸업한 후 진양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그 뒤 1934년 2월에 처음 경상남도경찰부 외사계에 순사로 입직하여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다. 1936년 순사부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1937년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이 되었다.# 이후 이후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사천경찰서를 거쳐 부산 수상경찰서 고등과 외사계 등지에 근무하였다. 하판락은 1940년 2월에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개명했으나, 이듬해에 완전한 일본식인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재개명했다.


 하판락은 일제의 고문 경찰로서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공산주의자들을 고문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당시 항일투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경남 고등경찰 3총사(부산의 하형사, 진주의 강형사, 마산의 박헌병)으로 꼽힌 것은 물론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42년 9월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70여 명을 검거하고 집단 고문한 끝에 투옥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1913~?)가 1994년에 출판한 회고록 '의학의 길목에서'에 나온 바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이듬해인 1943년 10월에는 경상남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반일투사를 색출해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하판락이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43년 3월에 일제의 침략전쟁 방해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1942년 5월에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군사시설 및 군수공장을 파괴하고 항일전단을 살포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획 중이던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이광우 등 천우회 회원 3명과 여경수 등까지 합해 7~8명을 고문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여경수 등은 그로부터 1주일 전에 '울산 부산 마르크스 레닌 연맹'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하판락은 사회주의자들의 항일훈동을 친우회 활동과 엮어 '청소년들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담했다. 기성 사회주의자들이 청소년들까지 포섭하여 불온 전단을 살포토록 사주했다.'고 날조하며 이들을 고문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다. 그리고 이어진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손가락 비틀기,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는 고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판락은 고문 당시 만 17세의 청소년이라 몸에 되도록 열상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한다고(???) 이광우에게 고춧가루 물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된 것. 실제로 이광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근육이 파열되어 30대 초반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착혈 고문
주사기로 착혈하는 고문귀
하판락
반민자 죄상기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린 것. 그리고는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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