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다크투어 29회 킬링필드 학살 주범 폴 포트 프로필 생애 나이 좌익 무장단체 강제 이주노동 캄보디아 프놈펜 도시민 임용한 복 위살봇 S-21 수용소 크메르 루주 보파나 시타
1월 4일 방송에서는 3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오늘이 가장 다크할 것”이라는 말로 여행을 시작한 임용한 다크가이드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자국민을 대상으로 발생했던 끔찍한 학살, 킬링필드의 현장을 찾아갑니다. 학살의 여파로 인해 약 3년 9개월간 캄보디아 국민의 25%가 사라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날 일일 다크 투어리스트로 합류한 복 위살봇도 킬링필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리고 삼촌 두 분이 목숨을 잃으셨다”는 복 위살봇은 여전히 킬링필드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부모님의 사연을 전합니다.
이와 함께 무고한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학살범 폴 포트의 모든 것도 공개됩니다.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이끄는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는 지식인은 물론 ‘손이 하얀 사람, 안경을 쓴 사람’ 등 무분별한 기준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후문입니다.
크메르 루주의 처형 대상을 본 봉태규는 “그냥 사람이면 다 죽인다”며 황당해하는 한편,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크메르 루주의 총칼을 피해갈 유일한 조건은 무엇일지 궁금증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주고받던 연인의 애틋한 편지가 다크 투어리스트들의 마음을 찡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은 ‘헤어지는 삶’”이라고 표현한 보파나의 편지는 물론 혼자 남겨진 그녀를 향한 사랑이 느껴지는 시타의 편지에 감탄하던 박나래는 “걸리면 둘 다 끌려간다”며 조마조마한 심정을 드러냈다는 후문입니다.
그녀의 걱정대로 크메르 루주에게 관계가 발각된 보파나와 시타는 악명 높은 S-21 수용소로 끌려가게 됐다고 합니다. 이에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못한 위태로운 사랑을 나눴던 두 남녀가 과연 그곳에서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이들의 최후에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나파와 시타가 수감된 S-21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성인 생존자가 단 7명에 불과하다고 해 그곳의 열악함을 짐작게 합니다. 수용소 곳곳에 포착된 고문의 흔적을 비롯해 실제 생존자의 증언까지 들은 장동민이 “정말 사람이 아니다”라며 분노해 다크 투어리스트들을 충격에 빠뜨린 S-21 수용소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오직 학살을 위해 마련된 공간 S-21 수용소의 참혹한 실상은 1월 4일 저녁 8시 50분에 방송됩니다.
크메르 루주
ខ្មែរក្រហម
Khmers rouges
▶ 활동 지역 : 캄보디아 제1왕국
크메르 공화국
민주 캄푸치아
태국
▶ 결성 목적 : 캄보디아의 공산화
▶ 결성일 : 1950년 6월
▶ 해산일 : 1999년
▶ 이념 : 크메르 민족주의
공산주의
급진주의
마르크스주의
▶ 참전 : 승전 베트남 전쟁
승전 캄보디아 내전
패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승전 베트남의 태국 국경 습격
폴 포트 프로필 나이 키 혈액형 학력
▶ ប៉ុល ពត | Pol Pot
▶ 본명 :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ar)
▶ 출생 : 1925년 5월 19일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 캄보디아 깜뽕톰주 쁘렉스버우
▶ 사망 : 1998년 4월 15일 (향년 72세) 캄보디아 왕국 우다르미언쩨이주 안롱뱅
▶ 국적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
→ 캄보디아 제1왕국 캄보디아
→ 민주 캄푸치아 민주 캄푸치아
▶ 학력 : 프놈펜 기술고등학교
프랑스 무선공학학교
▶ 신체 : 175cm, B형
▶ 정당 : 캄푸치아 공산당
▶ 종교 : 불교 → 무종교 (무신론)
▶ 배우자 : 키우 폰나리(ខៀវ ពណ្ណារី, Khieu Ponnary) → 메이사[키우와 이혼 후 재혼한 아내. 전처 키우 폰 나리와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메이사와는 딸 하나만 두었다.]
킬링필드
1960~7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로, 좁게는 폴 포트가 주도하던 크메르 루주 정권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처형한 사건을, 넓게는 이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1965~1979년 캄보디아의 인구 변화
▶ 1965년 6,602,000명
▶ 1970년 7,394,000명
▶ 1975년 7,500,000명
▶ 1979년 6,729,000명 하지만 이 통계도 1975년의 인구가 딱 떨어지는 750만 명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추측성 통계. 이후 설명하겠지만, 1970년 론 놀의 쿠데타 이후로 1993년 총선거 이전까지의 캄보디아는 혼란이 지속되었던 상황인지라 도저히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1960년에 설립된 좌익무장세력이었던 크메르 루주는 론 놀 정권의 친미 정책과 미국의 본토 폭격을 비판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의 실현과 론 놀 정부의 친미 노선 철폐라는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농민, 공장 노동자, 민족주의 세력이 모인 거대한 정치 공동체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 곧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서서히 민심을 잃고 있던 론 놀 정권은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함에 따라 치명타를 입었고 정치적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루 루주에 의해 수도인 프놈펜을 점령당하고 정권을 빼앗기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미 전국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크메르 루주는 자연스럽게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고 복귀를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물밑 작업을 펼쳤던 시아누크 국왕이 다시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1976년,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 국왕에게 온갖 혐의를 씌워 가택 연금을 시켰고,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국명을 바꿔 분위기를 환기시켰을지는 몰라도 현실은 똑같았다. 앞에 서술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농업의 붕괴로 극도의 실업과 식량난에 처한 사람들이 수도에 몰려들었으나 전부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친미 철폐를 외치며 반미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는 상황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경제 성장과 식량난을 곧 극복하겠다는 말로 이들을 달래어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이즘을 추종하여 폴 포트 본인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같은 짓을 옹호하는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다. 경제난 사회난에 크메르 루주와 공산주의 세력들은 바로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희대의 흑역사인 문화대혁명식 농촌 강제 이주를 결심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수천년 역사의 고국을 초기화시켜버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보다도 더욱 난장판이었다.[5]
이 전대미문의 대악행 중의 대악행을 저지른 크메르 루주의 수장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열성 엘리트로서 지식과 학력은 높았으나 사회 운영이나 갈등 조정에 관한 지혜가 부족했다. 게다가 가치관도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하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이라며 환영했던 민심이 괴상한 정책의 시행으로 떠나가기 시작하자, 폴 포트는 더욱 추잡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폴 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실제로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은 대학살은 민중의 순화의 수단이라는 극단적인 망언까지 남겼으며,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에 단 100만 명의 사람만 남더라도 우리는 학살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추악한 마음가짐으로 자국민들을 학살하던 폴 포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1977년 9월 "혁명에 반대하는 전체 인구의 1~2%만이 제거됐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조장하고자 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78년에는 캄보디아 인구의 20~30%가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후술할 극단적인 통제들을 일부 완화했으며[6], 사형도 '당과 혁명, 인민에게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자들'이나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대상'으로 한정지어 임의적인 처형을 줄이고자 했으며, 지방에 하방된 귀국 유학생들을 프놈펜으로 보냈고, 공장들에서는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전문기술 교육을 재개하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외무부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와 비서 관련 업무 교육과 국립공업전문대학 신설(!)까지 실시되었다.
물론 폴 포트는 자신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정책 그 자체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부에 배신자나 스파이가 숨어 '파괴활동'을 자행해서 그럴 거라고 믿었으며, 이로 인해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이때에도 수만 명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이고[7], 폴 포트가 집권할 당시 22명에 달하던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원이 폴 포트가 축출될 무렵에는 단 4명만 살아남았다. 심지어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었으며, 베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간부들이 우세했던 데다가 친베트남 성향이었던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서는 폴 포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한 동부 지역의 간부들에 대해 당 중앙군을 동원해 동부 지역을 침공해가면서까지 당, 군대 및 인민 모두에 대한 대규모 무차별 숙청을 가했고, 이에 따라 단 6개월 만에 동부 지역에 살던 약 150만 명 중 무려 25만 명이 사망했다. 이는 폴 포트 정권 하에 있던 모든 학살 중 가장 심각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간부들 중 일부는 베트남으로 피신했고[8],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또다시 학살을 저질렀다.
1967년에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 80년대 국내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인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로 알려져 있다. 이는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현지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 Khmêr Krâhâm)'이라 하는데 두 명칭 모두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지닌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하였으며, 반공주의 관점에선 공산주의의 나쁜 점을 설명할 때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매우 극단적이었던데다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평가가 별로 안 좋다. 오히려 미국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데 크메르 루주를 언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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